서론: ‘특허 절벽’이라는 낡은 신화
혁신적인 기술로 탄생한 고가의 상징적 제품이 있다. 이 제품의 핵심 기술을 보호하던 특허가 만료되자, 저가의 복제품, 소위 ‘클론’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온다. 이는 기술 기반 기업이 마주할 수 있는 가장 전형적인 위기 시나리오이며, 제약 산업에서 유래한 ‘특허 절벽(Patent Cliff)’이라는 용어로 잘 알려져 있다. 영국의 프리미엄 접이식 자전거 브롬톤(Brompton)은 바로 이 시나리오의 중심에 서 있는 듯 보인다. 독창적인 3단 폴딩 방식으로 도시 통근자들의 아이콘이 된 브롬톤은 200만 원을 호가하는 고가 자전거이지만, 핵심 특허가 만료된 후 100만 원 이하의 유사 제품들이 등장하며 시장 지위를 위협받고 있다.

실제로 최근 발표된 브롬톤의 이익 급락 데이터는 이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듯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 결정적인 착시가 있다. 브롬톤의 핵심 폴딩 기술 특허가 만료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25년 전인 1999년 10월 2일이다. 우리는 지금 눈앞의 복제품 때문에 브롬톤이 위태롭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브롬톤은 특허의 보호 없이 강산이 두 번 변할 시간 동안 시장의 지배자로서 성공적으로 생존하고 성장해왔다.
그렇다면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브롬톤은 어떻게 특허 만료 후 20년이 넘는 세월을 견뎌냈는가?
이하에서는 브롬톤의 사례를 통해 ‘특허 절벽’이 필연적인 종말이 아니라, 기업이 특허 독점 기간 동안 무엇을 준비했느냐에 따라 충분히 극복 가능한 파도임을 설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브롬톤의 여정은 특허의 진정한 가치가 영구적인 독점권이 아님을 명확히 보여준다. 특허의 진짜 가치는, 기업이 브랜드, 품질, 그리고 다각화된 IP 포트폴리오라는 견고한 ‘성채’를 구축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20년의 결정적인 ‘인큐베이션 기간’에 있다. 브롬톤의 이야기는 특허 절벽이라는 낡은 신화를 넘어, 현대 기업이 IP를 어떻게 전략적으로 재구성해야 하는지에 대한 완벽한 교본을 제공한다.
제1장: 특허의 약속과 한계: 브롬톤의 탄생과 독점의 시대 (1979-1999)
핵심 특허(EP0026800): 기술적 독창성의 구현
브롬톤의 역사는 1979년, 창립자 앤드루 리치(Andrew Ritchie)가 출원한 하나의 특허에서 시작된다. 유럽 특허 EP0026800으로 등록된 이 발명의 핵심은, 두 개의 피벗(pivot)을 이용하여 뒷바퀴가 메인 프레임 아래로 접혀 들어가고, 앞바퀴는 그 옆으로 나란히 접히는 독창적인 폴딩 메커니즘이었다. 이 기술 덕분에 자전거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매우 작고 운반하기 쉬운 형태로 변모할 수 있었다. 이 기술적 해결책이야말로 브롬톤이라는 제품을 정의하는 핵심 정체성이 되었다.\




‘특허 계약’의 작동: 20년의 전략적 활주로
특허 제도는 본질적으로 사회와의 계약, 즉 ‘특허 계약(patent bargain)’에 기반한다. 발명가는 자신의 기술을 대중에게 상세히 공개하는 대가로, 정해진 기간(통상 출원일로부터 20년) 동안 해당 기술을 상업적으로 독점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는다. 브롬톤에게 1979년부터 1999년까지의 20년은 바로 이 계약이 제공한 결정적인 시간이었다.
이 보호 기간 동안, 브롬톤은 신생 기업으로서 거대 자전거 제조사들의 즉각적인 모방 경쟁에 압도당하지 않고 자신만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안정적인 독점 환경 속에서 브롬톤은 효율적인 생산 공정을 확립하고, 타협 없는 품질에 대한 명성을 쌓았으며, 프리미엄 접이식 자전거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이 시기 동안 브롬톤의 기본 설계는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은 채(fundamentally unchanged)” 유지되었고, 회사는 세부적인 품질 개선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자전거를 판매하는 기간이 아니었다. 브롬톤이 ‘진정한 오리지널 접이식 자전거’라는 인식을 시장에 각인시키는 시간이었다.
특허의 전략적 가치는 영구적인 독점권 제공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특허는 기업이 이륙하여 안정적인 고도에 오를 때까지 외부의 난기류로부터 보호해 주는 20년 길이의 ‘전략적 활주로’ 역할을 수행한다. 이 기간 동안 브랜드, 품질, 유통망, 고객 충성도와 같은 무형 자산을 얼마나 견고하게 구축했는지가 특허 만료 이후의 운명을 결정한다. 따라서 특허가 만료되기 때문에 무의미하다고 질문하는 것은 초점을 벗어난 것이다. 올바른 질문은 “기업이 특허가 부여한 시간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했는가?”이다.
필연적인 만료와 새로운 전쟁의 서막
모든 계약에는 끝이 있듯, 브롬톤의 핵심 특허는 1999년 10월 2일부로 만료되었다. 이 날짜를 기점으로 브롬톤의 3단 폴딩 기술은 인류의 공동 자산, 즉 공공 영역(public domain)으로 편입되었다. 법적으로 이제 전 세계 어느 기업이든 동일한 원리의 폴딩 자전거를 합법적으로 생산하고 판매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브롬톤이 20년간 독점했던 평화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새로운 차원의 경쟁이 시작될 무대가 마련되었다.
제2장: 전장의 이동: 기능적 디자인을 저작권법으로 방어하다
특허 만료 후의 위협: 복제품의 등장
1999년 특허가 만료되자, ‘특허 절벽’ 시나리오가 예측한 대로 시장의 풍경은 변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체데크(Chedech) 자전거를 생산하는 겟투겟(Get2Get)과 같은 경쟁사들이 공공 영역이 된 3단 폴딩 메커니즘을 적용한 유사 자전거를 시장에 출시했다. 더 이상 특허 침해를 주장할 수 없게 된 브롬톤은 완전히 새로운 법적 전장을 개척해야만 했다.

새로운 법적 전략: 저작권이라는 창의적인 방패
브롬톤은 특허법의 울타리를 넘어, 훨씬 더 대담하고 창의적인 법적 주장을 펼쳤다. 바로 저작권 침해 소송이었다. 브롬톤은 자사의 자전거가 가진 독특한 ‘형태와 외관’ 자체가 기능적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독창적인 예술 저작물’이라고 주장했다. 기술적 기능의 보호가 아닌, 그 기능이 구현된 ‘미적 형태’의 보호를 요구한 것이다.
심층 분석: 유럽사법재판소(CJEU)의 역사적 판결 (C-833/18, Brompton v. Get2Get)
이 사건은 벨기에 법원을 통해 유럽연합(EU)의 최고 법원인 유럽사법재판소(CJEU)로 넘어갔다. 벨기에 법원이 CJEU에 질의한 핵심 쟁점은 “제품의 형태가 기술적 결과를 얻기 위해,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필수적인 경우에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가?”였다.
겟투겟 측은 자전거의 외관이 3단으로 접히는 ‘기능’에 의해 결정되었으므로, 이는 특허법의 영역이지 저작권법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CJEU는 이 문제를 매우 정교하고 섬세한 법리로 풀어냈다. 2020년 6월 11일 내려진 이 판결은 기능적 디자인의 저작권 보호에 대한 중요한 기준을 제시했다.


- 배타성의 원칙: 만약 제품의 형태가 ‘오로지(solely)’ 기술적 기능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면, 창작의 자유가 개입할 여지가 없으므로 저작권으로 보호받을 수 없다.
- 창작적 선택의 기준: 그러나 기술적 제약 속에서도 디자이너가 자신의 ‘개성(personality)’ 을 반영하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선택(free and creative choices)’ 을 통해 최종적인 형태를 완성했다면, 그 결과물은 ‘독창적인 저작물’로 인정되어 저작권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이는 기술적 고려가 창작자의 선택을 ‘제약’했을지언정, 창작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 대체 형태의 존재: 동일한 기술적 결과를 달성할 수 있는 다른 형태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창작적 선택의 가능성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유용한 단서가 될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독창성을 판단하는 ‘결정적인(decisive)’ 기준은 아니다. 법원의 초점은 ‘선택지가 있었는가’가 아니라, ‘이 창작자가 내린 특정한 선택들이 창의적이었는가’에 맞춰져야 한다.
이 판결은 브롬톤에게 EU 내에서 거둔 기념비적인 승리였다. CJEU는 “특허받은 디자인에 대한 저작권 보호를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관행”에 쐐기를 박았고 , 잠재적으로 저작자 사후 70년까지 보호 기간을 연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는 기존 특허 기간을 훨씬 뛰어넘는 강력한 보호 장치이다.
관할권의 역설: 한국에서의 다른 결말
그러나 IP 권리는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절대적인 방패가 아니다. EU에서의 승리와는 극명하게 대조적으로, 브롬톤은 한국에서 체데크사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최종 패소했다. 한국 법원은 유사한 폴딩 방식의 자전거를 합법적으로 제작하고 유통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이 두 가지 상반된 결과는 IP 전략의 본질이 지정학적이며 관할권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비교적 국제적으로 조화된 절차를 따르는 실용 특허와 달리, 응용미술 저작물에 대한 저작권 보호는 각국의 법리와 판례에 따라 해석의 여지가 매우 크다.
따라서 핵심 특허가 만료된 후의 법적 전략은 명확한 특허권을 방어하는 ‘정규전’에서, 저작권이나 트레이드 드레스와 같이 관할권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권리를 활용하는 ‘게릴라전’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는 EU와 같이 유리한 판례가 형성된 지역에서는 공격적인 권리 행사를, 한국과 같이 불리한 판결이 나온 시장에서는 다른 전략을 구사하는 등, 시장별 맞춤형 법률 접근을 요구한다. IP 전략이 순수한 기술 보호의 차원을 넘어, 지정학적이고 법리적인 차원의 고차원적 게임이 되는 것이다.
제3장: 다층적 IP 포트폴리오 구축 전략
견고한 IP 전략은 단일 권리에 의존하지 않고, 여러 권리를 겹겹이 쌓아 올린 다층적 방어 체계와 같다. 브롬톤의 전략은 특허와 저작권이라는 두 개의 큰 축을 넘어, 더 세밀하고 다양한 권리들로 확장된다.
점진적 혁신을 보호하는 디자인 특허
최초의 폴딩 기술 특허는 만료되었지만, 브롬톤의 혁신은 멈추지 않았다. 회사는 지속적으로 제품을 개선하고, 새롭게 추가되는 구성 요소들을 디자인 특허(미국 용어로는 디자인 페이턴트)로 보호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22년 미국에서 출원된 자전거 부품에 대한 디자인 특허(USD12,103,634)는 이러한 전략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러한 접근은 핵심 기술 주변에 수많은 소규모 권리들을 촘촘하게 엮어 ‘특허 덤불(patent thicket)’과 유사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경쟁사는 더 이상 단 하나의 만료된 특허만 피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제품을 구성하는 수많은 개별 부품의 디자인 권리까지 회피해야 하는 복잡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브랜드 방패로서의 상표권
‘브롬톤(Brompton)’이라는 이름과 로고는 그 자체로 강력한 자산이다. 상표권은 경쟁사가 브롬톤의 기능적 디자인을 모방하는 것을 막지는 못하지만, 소비자가 신뢰하는 ‘브롬톤’이라는 이름이나 로고를 사용하는 것은 완벽하게 차단한다. 이로 인해 복제품들은 ‘3sixty’, ‘pikes’, ‘aceoffix’와 같은 생소한 이름으로 시장에 진입해야만 한다. 이는 경쟁사들이 브롬톤이 수십 년간 쌓아온 브랜드 자산의 후광 없이, 맨바닥에서부터 자신들의 신뢰도와 인지도를 쌓아 올려야 함을 의미한다.
미개척 영역: 트레이드 드레스의 잠재력
트레이드 드레스(Trade Dress)는 제품의 출처를 식별하게 해주는 전반적인 ‘외관과 느낌(look and feel)’을 보호하는 권리이다. 브롬톤의 상징적인 곡선형 프레임과 독특한 실루엣은 잠재적으로 트레이드 드레스로서 보호받을 수 있는 강력한 후보다. 제품 디자인이 트레이드 드레스로 보호받기 위해서는 두 가지 핵심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첫째, 그 디자인이 기능적이지 않아야 하며, 둘째, 소비자들이 그 형태 자체를 브롬톤 브랜드와 연관 짓는 ‘2차적 의미(secondary meaning)’를 획득해야 한다.
CJEU의 저작권 판결이 유사한 영역을 다루고는 있지만, 트레이드 드레스는 특히 미국과 같은 특정 관할권에서 또 다른 강력한 법적 보호 수단을 제공할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IP 권리들을 결합하는 전략은 모방 시도를 법적으로 매우 위험하고 복잡하게 만든다. 최초의 실용 특허는 단단하지만 단일한 방벽이었다. 그것이 사라진 지금, 브롬톤은 저작권, 디자인 특허, 상표권, 그리고 잠재적인 트레이드 드레스 권리를 엮어 침해자가 쉽게 빠져나갈 수 없는 ‘거미줄(web of entanglement)’을 구축하고 있다. 이 거미줄은 어떤 단일 권리보다도 유연하고 복합적이다. 경쟁사는 만료된 특허를 회피하고(합법), 새로운 부품을 디자인하고(합법), 다른 브랜드명을 사용할 수 있지만(합법),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품의 전반적인 ‘외관과 느낌’에서 저작권이나 트레이드 드레스를 침해할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 다층적 접근법은 모방의 법적 비용과 리스크를 기하급수적으로 높여, 어지간한 의지를 가진 경쟁사가 아니고서는 섣불리 완벽한 복제품을 만들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효과를 낳는다.
제4장: 현실 점검: 25년 전의 특허 만료는 브롬톤에 실질적 타격을 주었는가?
특허 만료 후 20년: 성장의 시대 (2000-2022)
특허 만료가 브롬톤의 몰락을 가져왔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데이터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브롬톤은 핵심 특허가 만료된 1999년 이후 오히려 폭발적인 성장기에 진입했다.
- 생산량 증가: 2002년 연간 약 6,000대였던 생산량은 2013년에는 약 40,000대로 급증했다.
- 매출 성장: 2000년 200만 파운드였던 매출은 2002년 260만 파운드로 증가했으며, 2019년에는 4,200만 파운드를 넘어섰다. 회계연도 2023년 기준으로는 1억 2,940만 파운드라는 경이적인 수치를 기록했다.
- 혁신 가속화: 이 기간 동안 브롬톤은 티타늄 부품을 사용한 ‘슈퍼라이트(Superlight)’ 모델(2005년)을 출시하는 등, 프리미엄 시장을 겨냥한 혁신을 멈추지 않았다.
이러한 데이터는 특허 만료가 기업의 성장을 저해하는 절대적인 장애물이 아님을 명백히 증명한다. 오히려 브롬톤은 특허의 부재를 브랜드 가치와 지속적인 품질 혁신으로 극복하며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창출했다.
2024년 이익 급락의 진실: 범인은 특허가 아니다
가장 극적인 데이터는 2024년 3월 31일 마감된 회계연도에 발생한 99% 이상의 세전 이익 급락이다. 브롬톤의 이익은 전년도 1,070만 파운드에서 단 4,602파운드로 곤두박질쳤다. 이 수치만 보면 저가 복제품들이 마침내 브롬톤의 발목을 잡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원인을 깊이 파고들면 전혀 다른 진실이 드러난다.
- 잘못된 범인: 이익 급락의 원인은 25년 전에 만료된 특허나 그로 인한 복제품과의 경쟁이 아니다.
- 진짜 원인 – 자전거 산업 전체의 위기: 브롬톤의 CEO 윌 버틀러-애덤스(Will Butler-Adams)는 이익 급락의 원인을 “글로벌 자전거 시장의 매우 슬픈 상황(a really sad state of affairs in the global bicycle market)” 때문이라고 명확히 밝혔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폭발적인 수요 증가를 경험한 자전거 업계가 과잉 생산에 돌입했고, 이후 수요가 정상화되면서 엄청난 재고와 경쟁적인 할인 판매의 파도에 휩쓸렸다는 것이다.
- 재무 데이터의 증언: 브롬톤의 매출은 5.3%(1억 2,940만 파운드 → 1억 2,260만 파운드), 판매 대수는 8.2% 감소하는 데 그쳤다. 6% 미만의 매출 감소가 99% 이상의 이익 감소로 이어진 것은, 브롬톤이 대규모 할인 경쟁에 동참하지 않고 고정 비용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마진이 극도로 압박받았음을 시사한다.
복제품의 역할: 위기의 ‘가속제’
물론 이것이 복제품의 영향이 전무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티타늄 부품이나 디스크 브레이크 등 더 나은 사양을 절반 이하의 가격에 제공하는 복제품들은 ‘생활비 압박(cost of living squeeze)’ 시기에 소비자들에게 매력적인 대안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즉, 복제품은 위기의 근본 원인은 아니었지만, 시장 불황이라는 악조건 속에서 브롬톤의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가속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표 1: ‘특허 절벽’ 서사 해체: 브롬톤 재무 현황 비교 (FY2023 vs. FY2024)
지표 | 회계연도 2023 | 회계연도 2024 | 변화율 | 비고 |
매출 | 1억 2,940만 파운드 | 1억 2,260만 파운드 | -5.3% | |
세전 이익 | 1,068만 파운드 | 4,602 파운드 | -99.96% | |
자전거 판매 대수 | 91,875 대 | 84,899 대 | -8.2% | |
대당 평균 매출 | 약 1,408 파운드 | 약 1,443 파운드 | +2.5% | 계산치 |
이 표는 특허 절벽이라는 단순한 서사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강력한 증거다. 가장 주목할 만한 지표는 ‘대당 평균 매출’이 오히려 2.5% 증가했다는 점이다. 이는 브롬톤이 복제품과의 가격 전쟁에 휘말려 출혈 경쟁을 하는 대신, P 라인과 T 라인 같은 더 고가의 프리미엄 제품 판매에 집중하며 브랜드 가치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2024년의 이익 급락은 IP 전략의 실패가 아니라, 외부 시장 충격에 대한 비즈니스 회복력의 시험대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는 논의의 초점을 ‘IP의 실패’에서 ‘시장 불황 속에서의 비즈니스 회복탄력성’으로 전환시킨다.
제5장: 미래를 위한 청사진: 레고(LEGO)와 다이슨(Dyson)의 교훈
브롬톤의 장기적인 생존 전략을 가늠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유사한 ‘특허 절벽’을 성공적으로 넘어선 다른 상징적인 기업들의 사례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장난감 업계의 거인 레고와 가전제품의 혁신가 다이슨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강력한 해법을 제시한다.
레고의 청사진: 브릭 특허에서 IP 생태계로
- 절벽의 경험: 레고의 핵심 브릭 특허는 1988년에 만료되었고, 2000년대 초반 회사는 심각한 경영난에 직면했다. 심지어 EU 법원은 레고 브릭의 형태가 기능적이어서 상표로 보호받을 수 없다고 판결하기도 했다.
- 전략적 전환: 2003년, 레고는 핵심 제품인 브릭에 다시 집중하는 한편, 제품을 둘러싼 거대한 ‘경험의 생태계’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전면 수정했다. 보호의 대상을 ‘물리적 객체’에서 ‘총체적 경험’으로 전환한 것이다.
- 핵심 전술:
- 브랜드 및 라이선싱: ‘LEGO’라는 상표를 철저히 보호하는 동시에, 스타워즈, 해리포터, 마블과 같은 강력한 외부 IP를 적극적으로 라이선싱하여 수십억 달러 규모의 비즈니스를 창출했다. 이제 레고의 핵심 가치는 브릭의 형태가 아니라, 그 브릭으로 구현할 수 있는 무한한 ‘이야기’와 ‘세계관’이 되었다.
- 디지털 엔터테인먼트: 비디오 게임, 영화, 앱으로 사업을 확장하여 경쟁사가 모방할 수 없는 다층적 플랫폼 경험을 제공했다.
- 커뮤니티 구축: ‘레고 아이디어스(LEGO Ideas)’와 같은 플랫폼을 통해 전 세계적인 팬 커뮤니티를 육성하고, 고객을 공동 창작자이자 브랜드 전도사로 만들었다.
다이슨의 청사진: ‘특허 덤불’과 끊임없는 점진주의
- 핵심 아이디어: 제임스 다이슨의 초기 성공은 먼지 봉투 없는 사이클론 분리 기술이라는 핵심 특허에 기반했다.
- 전략의 핵심: 다이슨의 전략은 단 하나의 핵심 기술에 머무르지 않고, ‘지속적인 혁신(continuous innovation)’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그들은 사소해 보이는 개선점 하나하나까지 모두 특허로 출원한다.
- 핵심 전술:
- ‘특허 덤불(Patent Thicket)’ 구축: 다이슨은 수천 개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핵심 기술뿐만 아니라 디지털 모터, 필터 시스템, 배터리 기술, 인체공학적 디자인, 모듈형 부품 등 제품의 모든 측면을 촘촘하게 포괄한다. 이는 경쟁사가 어떤 식으로든 유사한 고성능 제품을 만들려고 할 때, 다이슨의 특허 그물망 어딘가에 걸릴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전략이다.
- 끊임없는 목표 이동: 다이슨은 새로운 특허로 보호받는 개선된 신제품을 계속 출시함으로써 이전 세대 모델을 구식으로 만든다. 경쟁사들은 항상 움직이는 목표물을 쫓는 힘겨운 추격전을 벌여야 한다.
브롬톤의 하이브리드 전략
브롬톤의 현재 전략은 이 두 가지 모델의 장점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형태로 나타난다.
- 레고처럼: 브롬톤은 ‘도시의 자유(urban freedom)’라는 라이프스타일을 중심으로 강력한 브랜드와 커뮤니티를 구축하고 있다. 유명 아티스트와의 협업, 그룹 라이딩 이벤트 등을 통해 물리적 제품을 초월하는 경험적 가치를 창출한다.
- 다이슨처럼: P 라인, T 라인, G 라인, 전기 자전거 등 새로운 라인업을 지속적으로 출시하며 혁신을 멈추지 않는다. 티타늄과 같은 신소재를 도입하고 12단 기어와 같은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며, 이러한 새로운 요소들을 디자인 특허 등으로 보호하고 있다.
특허 만료 이후, 기업의 가치 제안은 ‘제품이 무엇을 하는가(what it does)’에서 ‘제품이 무엇인가(what it is)’로 전환되어야 한다. 실용 특허는 ‘3단으로 접힌다’거나 ‘사이클론으로 먼지를 분리한다’와 같은 ‘기능’을 보호한다. 특허가 만료되면 이 기능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상품(commodity)이 된다.
레고, 다이슨, 그리고 브롬톤과 같은 성공적인 기업들은 그들의 가치를 ‘정체성’으로 옮겨왔다. 레고 세트는 창의성과 인기 캐릭터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장권’이다. 다이슨 청소기는 최첨단 엔지니어링과 우월한 성능의 ‘상징’이다. 그리고 브롬톤 자전거는 타협 없는 품질, 영국 장인정신의 유산, 그리고 특정 도시 라이프스타일을 향유하는 ‘증표’이다. 이러한 정체성은 실용 특허가 아닌 상표권(브랜드명), 저작권/트레이드 드레스(상징적 외관), 디자인 특허(진화하는 미학), 그리고 무엇보다 강력한 브랜드 충성도와 커뮤니티라는 무형의 해자(moat)에 의해 보호된다. IP 전략 역시 이러한 무형의 가치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야만 한다.
결론: 특허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브롬톤의 사례는 특허의 역할과 가치에 대한 전통적인 통념에 도전하며, 현대 기술 기업의 IP 전략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서두에서 제기된 질문들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이 종합될 수 있다.
- 특허 만료가 브롬톤의 사업에 영향을 주었는가?
그렇다. 그러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다. 특허 만료는 브롬톤의 쇠퇴를 야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품질, 브랜드, 지속적인 혁신을 통해 경쟁하도록 강제함으로써 이후 20년간의 성장을 이끄는 촉매제가 되었다. 최근의 재정적 어려움은 25년 전 만료된 특허의 부재가 아닌, 자전거 산업 전체를 덮친 주기적 위기에서 비롯된 것이며, 다만 복제품의 존재가 그 위기 상황에서 취약점으로 작용했을 뿐이다. - 유한한 존속기간 때문에 특허는 무의미한가?
결코 그렇지 않다. 브롬톤의 사례는 특허의 가장 큰 가치가 기업에게 결정적인 보호막 속에서 성장할 수 있는 ‘전략적 활주로’를 제공하는 데 있음을 증명한다. 특허가 보장하는 20년의 시간은 발명가가 브랜드, 품질, 유통망, 그리고 후속 IP 포트폴리오와 같이 특허 자체보다 훨씬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견고하고 영속적인 경쟁 우위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귀중한 기회다. - 특허만이 유일한 해답인가?
아니다. 특허는 새로운 기술적 발명을 보호하기 위한 가장 강력하고 우선적인 수단이다. 그러나 브롬톤의 사례는 특허 만료 이후의 생존 전략이 저작권, 디자인권, 상표권, 그리고 잠재적으로 트레이드 드레스를 정교하게 조합하고, 이를 각국의 사법 관할권 특성에 맞춰 적용하는 고도의 법률적, 사업적 통찰을 요구함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는 끊임없는 제품 혁신과 강력한 브랜드 구축 활동이 병행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브롬톤의 이야기는 특허의 취약성에 대한 경고가 아니다. 오히려 지식재산권에 대한 총체적이고 역동적인 접근이 왜 필수적인지를 보여주는 교훈적인 서사다. IP 전문가가 고객에게 제공해야 할 조언은 단순히 첫 특허를 출원하는 것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 그 조언은, 그 첫 번째의 결정적인 특허가 만료된 한참 후에도 기업이 번영할 수 있도록, 다층적인 포트폴리오와 브랜드 전략을 구축하는 전 과정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최초의 특허는 성채를 지어주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성채를 지을 땅을 확보하고, 공사를 마칠 시간을 벌어줄 뿐이다.